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흐메트 2세 (문단 편집) == 여담 == * 그가 정복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시가지, 즉 오늘날의 [[이스탄불]] 구시가지 지역은 그를 기념해 파티흐(Fatih, 정복자) 구역으로 불린다. * 젊은 시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년 생, 20대~30대 추정]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레오나르도 특유의 질질 늘어지는 제작기간에 질려 도중에 취소되고 돌아갔다는 설화가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하는 썰이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의 14살짜리 막내 아들 야코보스 노타라스가 용모가 빼어난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고[* 참고로 스프란체스라는 인물의 딸과 아들이 유명한 미소녀와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둘 다 하렘에 끌려갔다. 딸은 어릴 때 죽었고, 소년은 술탄의 욕망을 거부했다가 살해당한다고 한다.] 아들을 하렘에 바치라고 명했는데 노타라스가 이를 거부하자 노타라스와 그의 두 아들[* 혹은 한명은 사위. 막내 아들은 처형 당하지 않고 하렘으로 보내졌다가 20대 초반에 이탈리아로 탈출했다는 [[https://en.wikipedia.org/wiki/Jacob_Notaras|전승]]도 있다.]을 [[참수]] 해버렸다는 일화가 바로 그것. 소년 시절에는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와 있던 [[블라드 가시공]]과 그의 동생 [[라두 3세|라두]]를 희롱했다는 썰도 있다.[* 가시공은 죄수의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잔인한 형벌로 유명한데 오스만 궁정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 메흐메트에게 항문성교를 당해 생긴 트라우마가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형벌로 발전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 노타라스의 처형에 관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한참 전에 딸과 누이를 베네치아로 피신 보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거나, 정복자로 입성한 메흐메트 앞에 국고에서 빼내 온 금은보화를 싸 들고 나타났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방위비로 썼어야지. 너 같은 놈을 두고 반역자라고 하는 거다."''' 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사실 음흉한 생각으로 부른게 아니라 소년을 총애해 [[고관대작]]으로 키워주려고 했던 건데 루카스 노타라스는 메흐메트 2세가 남색하려고 아들을 부른다고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술탄의 명령을 거부, 졸지에 쇼타콘으로 몰린 술탄이 열받아서 노타라스를 죽였다는 설도 있다. * 이렇게 메흐메트를 양성애자로 묘사하는 기록은 두카스나 라오니코스 할코콘딜리스 등 그리스측 역사가들의 기록에 보이는데, 현대 튀르키예의 역사가인 할릴 이날즉(Halil İnalcık)은[* 현대 튀르키예 역사학계의 실질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거물 대접을 받는데, 물론 학문적 성과도 성과지만, 아직까지도 비교적 정정하신 영감이 출생 년도가 1916년, 즉 오스만 제국이 아직도 살아 있었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학회나 강의 등을 경험한 다른 젊은 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트에 필기를 문자 개혁 이후의 라틴 알파벳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랍 문자]]로 적힌 [[오스만어]]로 했다고 할 만큼 후덜덜한 연륜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2016년 7월에 딱 100세 채우고 타계.]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기록 어디를 살펴보아도 황제가 남자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은 없다며 그리스 측의 기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바가 있다. * 미소년썰과 더불어 [[수박]]을 훔쳐먹은 범인을 찾겠다고 하인들의 배를 갈랐다는 썰도 전해진다. 이 썰은 유럽인들의 흠집내기성 가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무술 실력도 꽤 뛰어났던 모양인지,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인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벨그라드 전투인데 헝가리 왕국군이 성문을 열고 돌격하는 바람에 오스만 측의 전열이 무너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퇴각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것으로, 무용에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지 않으면 벌이기 힘든 일이다. 단,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서 오히려 오스만군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정복 후 10년이 지난 해에 메흐메트 2세는 흐리스토둘로스[* 다른 출처에서는 이 건축가의 이름이 아틱 시난(Atik Sinan)이라고도 전하는데 역시 그리스인이라는 기록은 똑같다.]라는 이름의 그리스인 건축가에게 [[모스크]]를 하나 짓되, 돔 크기를 [[하기아 소피아|아야소피아]]보다 더 크게 지을 것을 지시했다. 흐리스토둘로스는 자신이 만든 모형을 보여주면서, "폐하 그렇게 하면 지진으로 돔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막무가내였고, 흐리스토둘로스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은채 아야소피아보다 돔의 크기를 작게해서 모스크를 세웠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노발대발하여 이 불충한 건축가의 손을 자를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흐리스토둘로스는 자기 주장을 꺾지 않고 증거를 제시하며, 메흐메트 2세의 제안대로 모스크를 만든다면 작은 지진에도 모스크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고, 졸지에 손을 잃어버린 흐리스토둘로스는 자신이 처하게 된 억울한 상황에 항의하여 메흐메트 2세를 법정에 세우게 된다. 당시 이스탄불의 대법관은 흐즈르 베이(Hızır bey)였다. 흐즈르 베이는 흐리스토둘로스의 고발장과 그가 가져온 증거들을 보고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법정에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채, 황제 독단적으로 사람의 손을 잘라버렸다는 점을''' 들어 흐즈르 베이는 메흐메트 2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샤리아]]에 따라 메흐메트 2세의 손도 자를 것을 판결한다. 그러자 흐리스토둘로스는 놀라서 재판관 흐즈르 베이에게 간청하여 소를 취하해달라고 요청하는데, 결국 흐즈르 베이는 메흐메트 2세에게 유죄인 건 변함이 없지만 손을 자르는 대신 벌금으로 흐리스토둘로스에게 정당한 배상을 할 것을 판결한다. 이후 16 ~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풍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에울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의 기록에 따르면 판결직후, 메흐메트 2세는 칼을 뽑으며 흐즈르 베이에게, "만약 그대가 [[알라]]의 법을 무시한채 짐의 손을 자르라고 판결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대의 목을 쳤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흐즈르 베이는 감추어두었던 단검을 꺼내들며, "만약 폐하께서 제 판결에 동의하지 않으셨더라면 저 또한 폐하를 이 칼로 찔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당히 유명한 일화로 [[이슬람교]]에서 황제가 되었든 그 누가 되었든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도 상당히 대인배였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흐리스토둘로스가 세운 그 [[모스크]]는 1766년에 지진으로 무너지고,[*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메흐메트 2세가 흐리스토둘로스에게 지시해서 세운 [[모스크]]가 있던 자리는 옛 [[동로마 제국|동로마]] 황제들의 영묘가 있던 성 사도 성당 자리이다. 이미 영묘들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들에 의해 깡그리 털려서 속빈 강정이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미 낡아서 붕괴 위험에 처한 사도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세웠다. "다만 이전 황제들에 대한 존중의 차원 + 기초공사 비용 절감을 위해 지하 영묘는 건드리지 않고, 그 위에다가 건물을 올렸는데, 지진으로 이 모스크가 무너진 이후 지금의 파티흐 모스크를 건설할 당시까지도 지하 영묘가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후대에도 "선황의 뜻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발굴 조사 없이 그대로 모스크를 올려서 현재도 땅 속에 남아있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파티흐 모스크 단지(Fatih Külliyesi)가 세워졌으며 메흐메트 2세가 재판을 받았던 그 법정도 2006년에 복원되었다. *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했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라 비슷하게 정복자로 불리는 업적을 이루었다. * [[오스만어]], [[세르비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최소 [[폴리글롯|6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